주역과 가치있게 사는 방법-김계유

이곳은 김계유님의 강좌공간입니다.

 

추후

약력을 기재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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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가치있게 사는 방법-김계유”에 대한 3개의 댓글

  1. 제 1강 편지글로 읽는 고전1- 여민동환(與民同患)의 이치를 생각한다

    자식을 둔 부모로서 가장 마음 무거운 일은 우리의 교육 현실을 떠올리는 일이다.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 것인지, 장래 문제는 어떻게 끌어줘야 하는지. 그러나 그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이 땅의 부모들뿐일까? 교육 현장의 그들 자신과 비교하면 오히려 그것은 남의 고민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지금 우리 시대의 전설이 되어 떠도는 이 땅의 교육 현실을 짐짓 안타까운 심정으로 되새기게 된다.
    전설이 된 교육.
    불을 끄고 떡을 썰었다는 한석봉의 어머니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리 시대의 전설이다.
    우리네 아이가 머무는 교실 건물의 어느 구석
    눈을 감아도 들려오는 책장 넘기는 소리
    혹은 우리 아이의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
    열 개 혹은 두 개를 더한 계단을 거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식당 건물이 있고
    열 줄 혹은 거기서 세 줄이 모자란
    우리 아이의 강의실 책상과 의자가 보이고
    폈다 움츠렸다 앉은 자세 속에 숨은 우리 아이의 꿈도 보이고
    때로는 더디고 때로는 빠르게 흐르면서
    네 마음의 뿌리에 짙은 먹물 자국을 새겨가는
    일초 일분의 그곳 시간들도 보이고
    그때 그 건물에서 세찬 칼바람이 되어 달려드는
    너와 나 우리의 외로움은
    세상의 온갖 유혹에도 아랑곳 않는
    내 마음의 유리창 안쪽
    뿌옇게 피어나는 성에꽃도 있었지.
    누구나 단번에 오를 수야 있겠니
    신발 끈을 동여매고
    무한한 두려움의 길가 풍경에도
    때로는 눈을 감거나
    뻣뻣한 긴장의 목을 움츠리기도 하면서
    꿈이라고 불러도 좋은
    눈 덮인 시간의 아쉬운 추억이어도 좋은
    어깨 움츠린 사람들의 파카옷 한 벌이어도 좋은
    함께 피어나는 꽃이어도 좋은
    붓 한 자루 전설은
    잊혀진 외로움의 꿈 같은 전설은
    아직도 살아 있다.
    사람의 일이란 살아가면서 그렇더라. 누가 특정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고민하느냐가 바로 그 일의 깊이와 전문성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법. 나는 이 땅의 힘들고 험한 교육환경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의 위안을 그 쪽에서 찾게 된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생뚱맞기도 하겠지.
    견디기 어려운 일상의 중압감 그것을 자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이해해 줄 수 없을테니까. 그렇지만 그 압박감을 우리는 홀로 된 시간의 자기 자신과 마주해서 사람이 글을 쓸 때의 부담과 결부시키면 혹 납득되는 구석도 있지 않을까.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 실타래를 어떻게 풀고 마음의 움직임과 상황의 변화를 어떻게 배치하고 명분을 제시해야 할 것인지. 표현은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인지. 이런 것을 생각하는 마음의 부담감 그것이 바로 글을 쓰기 전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너희가 자라면서 곧 알겠지만 실제 글을 써보면 이런 것들은 하나의 부질없는 기우일 때가 대부분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론 결론은 뻔하다.
    긍정적인 삶이 되어야 하고 주어진 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식의 그러나 그 뻔한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자기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엮어질 수 있어야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고 늘 평온한 삶일 수 있는지, 적어도 기쁨은 아니라도 내일을 떠올리면 희망을 생각할 수 있는 삶이 될 것인지 그것을 생각해보자는 거다.
    그렇지 인간의 유일한 희망 그것을 나는 고전의 숲에 기대어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옛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 복잡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분명한 어조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 오직 그것만을 우리에게 주문할 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문구만을 상징적으로 떠올려본다면 그것은 바로 주역의 여민동환(與民同患)이다.
    해당 문구는 주역 계사전 상 11장의 다음 단락이다.
    聖(성)人(인)以(이)此(차)洗心(세심), 退(퇴)藏(장)於(어)密(밀), 吉(길)凶(흉)與(여)民(민)同(동)患(환),
    성인이 역으로써 마음을 닦으며 물러가 빽빽한 데 감추되, 길흉에 있어서 백성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 나눈다.
    이 단락의 핵심 주제가 이를테면 우리가 여기서 다루려는 여민동환(與民同患)이다.
    여민동환(與民同患), 글자 뜻대로 해석하면 사람들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 나눈다는 뜻 정도다. 쉽게 말하면 이웃 사랑의 정신이다.
    만학의 제왕이라고 일컫는 역의 핵심 주제, 그것이 뭔가 특별하고 거창할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 오직 그것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겠는가.
    세상의 변화를 말하고 희망을 말하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 오직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사랑뿐임을 먼저 의심해서는 안 된다.
    실제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의 힘든 삶을 위해서,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받는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 자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때 그 자신의 내적 변화는 어떤 색깔이겠는가? 당연히 기쁨일 것이다. 그래서 그 자신도 어느새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활로를 찾고 싶어지게 된다.
    남이 자기의 처지를 헤아려주고 자기는 남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우리의 삶,
    너는 내가 희망이고 나는 너로 인해 기쁨 가득한 여민동환(與民同患)의 삶.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에게 좌절감을 강요할 수가 있겠어?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의 삶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한 장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어떤 어려움 어떤 시련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로 화나고 때로 짜증도 부리게 되겠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하나의 신비로운 마음의 한 형태였다는 것을 이웃 사랑의 풍속도 안에서는 언젠가 분명히 깨닫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이와 같은 역의 정신을 자기가 유세하며 만나던 당시의 군주에게 음악에 견주어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즐기는 음악과 더불어 즐기는 음악 가운데 어느 쪽의 즐거움이 더 크겠습니까?”
    “혼자서 즐기는 음악이 아무래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소수의 몇몇 사람만이 즐기는 음악과 대중들이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음악은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즐겁겠습니까?”
    “대중들이 더불어 즐기는 음악만 못하겠지요.”
    제선왕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백성이 더불어 즐거워하는 음악을 왕께서는 좋아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제 왕께서 울려대는 쇠와 북 등의 타악기 및 젓대와 피리 등의 현악기 연주 소리를 듣고 백성이 이마를 찌푸리면서 머리를 아파하며 쑥덕거리기를 우리 왕이 음악은 좋아하시면서 백성은 어떻게 이토록 곤궁하게 내버려 둘 수 있느냐고 원망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또 왕께서 음악은 좋아하시나 음악을 듣는 백성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부모 자식은 물론 형제와 처자 간에도 서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한다면 왕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맹자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냥도 마찬가지입니다. 왕께서 사냥을 하시는데 백성이 사냥하는 왕의 수레와 말발굽 소리를 듣거나, 바람에 나부끼는 기와 깃발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모두 외면하면서 머리를 아파하고 이마를 찌뿌리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사냥을 저토록 좋아하시면서 우리는 왜 이토록 곤궁한 지경까지 내버려두느냐고 원망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사냥은 좋아하시면서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모여 살지 못하고 형제 및 처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아가야 한다면 왕께서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해답은 너무나 분명할 것입니다. 왕께서 백성과 더불어 음악을 즐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맹자의 왕도정치란 백성을 보살피는 정치,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다.
    이로써 보면 백성과 더불어 음악을 즐긴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즐기는데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마음이 어질어 백성으로 하여금 각기 자기의 가족과 부모 형제를 평안하게 보전하는 정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전국시대 당시의 곤궁하고 피폐해진 백성을 구원하려는 맹자의 절실한 노력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행위의 동기가 누구나 이렇다면 얼마나 세상이 따뜻해지겠는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행위의 동기가 맹자의 이런 주장과 맥을 함께 한다면 얼마나 자기 자신의 마음이 따뜻해지겠는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정신 위에 서 있을 때라야 필연코 지극해지게 된다.
    삭막하지 않은 세상, 그래서 훈훈한 세상의 풍경을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이런 고전의 원리뿐임을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돈과 권력이 신처럼 추앙받는 우리들의 어제 오늘일지라도 마음 한 구석 진실로 그 믿음까지 허물지 않는 일상이 되어지길.

  2. 제 2강

    여민동환(與民同患)의 발상! 하늘의 중천건(重天乾)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웃 사랑의 여민동환(與民同患)이 고전의 가르침에서는 어떤 맥락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우리 삶의 뿌리가 하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역의 해당 본문 구절을 먼저 소개하자.

    大(대)哉(재)乾(건)元(원)! 萬(만)物(물)資(자)始(시) 乃(내)統(통)天(천). 雲(운)行(행)雨(우)施(시), 品(품)物(물)流(유)形(형).

    거룩하다, 하늘의 덕(乾元)이여! 만물이 힘입어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거느렸구나.(하늘에 줄기하고 있다는 뜻) 구름이 가고 비가 내려 만물이 형체를 갖춘다.

    한 마디로 우리는 본래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생명체이므로 하늘의 덕을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바로 앞 여민동환(與民同患)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노자 도덕경에서는 역의 여민동환(與民同患) 대신 직접 사람이 본받아야 할 이치는 결국 하늘의 덕일 수밖에 없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는 구절도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노자 도덕경 25장)

    마치 역에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만물의 구성 요소로 이해하면서 땅은 하늘에 대하여 유순해야 하고 사람은 만물을 낳아 기르는 땅의 후덕함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는 가르침 그대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단락을 바꾸기 전에 진지하게 음미해 보아야 할 주제가 하나 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무게 중심 즉 세상 만물이 하늘과 땅의 사귐에 의한 결과라면 그때 생겨나는 작용의 중심을 어디에 맞추어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하는 문제다.

    옛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서 이에 대한 견해를 달리해왔다.

    이를테면 하늘 중심의 사고는 주나라 시대의 견해였다.

    반면 땅 중심의 사고는 은나라 시대, 사람 중심의 사고는 하나라 시대의 세계관이었다.

    또 이렇게 시대별로 상이한 세계관의 차이는 나름대로의 그럴만한 타당성도 존재한다.

    하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관점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예외 없이 하늘에 뿌리를 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땅 중심으로 생각이 기울었던 것은 세상 만물의 본질은 하늘이지만 하늘의 작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으려면 결국 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반면 사람 중심의 사고는 하늘과 땅의 작용이 있고 난 뒤 눈앞에 목격되는 현상 중심으로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시각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런 옛 사람들의 어느 관점을 일상생활에 받아들여 활용하고 있을까?

    달력이 사람 중심의 사고라면 주역은 하늘의 이치 중심이다.

    예를 들어 육갑(六甲)으로 일 년의 변화를 표기한다고 하자.

    토성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에는 1월의 천간(天干)이 항상 병인(丙寅)으로 정해져 있다. 금성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을년(乙年)과 경년(庚年)에는 1월의 천간(天干)은 항상 무인(戊寅)이다. 소위 오행(五行)이라고 일컫는 목성 및 화성 수성 등의 나머지 간지(干支)도 원리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책력 구성의 원리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람 중심의 사고를 반영한 결과다. 즉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달의 지지가 자(子)가 아닌 세 번째 인(寅)이 된다는 것은 바로 세상의 눈을 사람 중심의 세계관으로 압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런 제도의 시작을 이끈 사람은 춘추시대의 공자다.

    안연(顔淵)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물었을 때의 일이다.

    공자께서는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제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책력은 하나라의 때를 채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석에 의하면 하나라의 때는 인월(寅月)로 한 해의 첫머리를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하늘은 자(子)에서 열리고, 땅은 축(丑)에서 열리며, 사람은 인(寅)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 세 때는 모두 한 해의 머리로 삼을 수가 있는데 하·은·주(夏·殷·周) 삼대가 제 각기 달리 적용하였다.”

    그 까닭에 지금의 책력은 언제나 첫 머리가 사람 중심의 인월(寅月) 세수(歲首)가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주역은 하늘의 이치 중심이다.

    문왕은 역의 차례를 배치하면서 첫머리에 하늘 괘인 중천건(重天乾)이 오게 하였다. 또 기록에 의하면 땅 중심의 귀장역(歸藏易)과 사람 중심의 연산역(連山易)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를 도표로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분류
    나라
    역의 명칭
    歲首
    비고

    인통人統
    하夏
    연산역連山易
    인월세수寅月歲首․

    인생어인人生於寅
    사람중심의 사고

    지통地統
    은殷
    귀장역歸藏易
    축월세수丑月歲首․

    지벽어축地闢於丑
    땅 중심의 사고

    천통天統
    주周
    문왕의 주역周易
    자월세수子月歲首․

    천개어자天開於子
    하늘 중심의 사고

    천지만물의 생성이치가 하늘 중심이라면 중천건(重天乾) 하늘 괘가 역(易)의 머리 괘가 될 것이고 땅 중심이면 중지곤(重地坤) 땅 괘가 사람 중심이면 중산간(重山艮) 산 괘가 되게 된다.

    그렇다면 옛 시대와 달리 지금의 우리들은 어떨까?

    하늘 중심일까?

    땅 중심일까?

    아니면 사람 중심일까?

    혹 돈 중심이거나 권력 중심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평소 경향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것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주역 문언전에서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보는 게 이롭다는 구오 효사에 대해 설명하면서(九(구)五(오)曰(왈)“飛龍(비룡)在天(재천), 利(이)見(견)大(대)人(인)”, 何(하)謂(위)也(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에 대한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같은 소리는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하여, 물은 습한 데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나아가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그리하여 성인이 나옴에 만물이 우러러본다.

    하늘에 근본을 두고 있는 자는 위를 친하고 땅에 근본을 두고 있는 자는 아래를 친하니, 각기 그 류를 따르는 것이다.”(“同(동)聲(성)相(상)應(응), 同(동)氣(기)相(상)求(구), 水(수)流(류)濕(습), 火(화)就(취)燥(조), 雲(운)從(종)龍(룡), 風(풍)從(종)虎(호), 聖(성)人(인)作(작)而(이)萬(만)物(물)覩(도), 本(본)乎(호)天(천)者(자)親(친)上(상), 本(본)乎(호)地(지)者(자)親(친)下(하), 則(즉)各(각)從(종)其(기)類(류)也(야).”)

    공자의 말씀이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보는 게 이로울 것이라는 중천건(重天乾) 구오(九五)의 효사를 이렇게 해석하는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천도 운행의 법칙을 통한 바람직한 세계관의 모색때문이다.

    하늘의 덕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면 그 덕을 실현해 보여주는 자리는 이곳 중천건(重天乾) 구오(九五)이며 이 땅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지향점은 바로 여기에 맞추어지기를 바라는 공자의 믿음 때문이다.

    그 예로서 계사전에 바탕을 둔 간보(干寶)의 구오(九五) 해석을 인용해보자.

    계사전의 주석에 문왕이 경을 쓰심에 포희씨를 중천건(重天乾) 오효에 결부시켰다. 포희는 곧 태호씨다. 가어(家語) 오제덕(五帝德)에 태호는 만물이 생겨나게 하는 목(木) 기운의 덕에 짝이 된다고 하였다.

    만물을 살아나게 하는 목(木) 기운과 그 기운을 자신의 덕으로 승화시켜 나라를 열었던 포희씨와 그것을 상징하는 개념으로서의 용! 그러므로 좌전 소공 17년에 태호씨가 용(龍)으로서 나라의 기본 틀을 삼으므로 용사(龍師)가 되는 용(龍)으로 이름하였고 포희씨가 대개 목덕(木德)으로 왕 노릇을 했으므로 관직의 명칭도 결국 용(龍)으로 정했다.

    그리고 월령에도 “계춘의 달은 임금이 태호씨다.”고 하였다. 만물을 낳아 뻗어가게 하는 계절의 기운이 바로 그때가 되는 때로 역의 괘상은 택천쾌(澤天夬)다. 이쯤 되면 우리는 왜 역사를 말하면서 항상 오제(五帝) 앞에 포희씨를 내세우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왕일(王逸)은 천문주(天問注)에서 복희씨가 처음 8괘를 그리고 도덕을 닦아 행하여 만민을 위한 자리에 임금으로 올랐다고 했으니 그 말의 뜻도 음미하면 바로 이런 이치가 된다.

    이처럼 하늘의 이치를 말하면서도 초점은 결국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살아나게 하는 덕스러움에 맞추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살핀 여민동환(與民同患)의 개념과 무엇이 다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줄기를 두고 하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당연히 추종해야 하는 지향점은 세상과 세상 사람을 사랑하는 하늘의 덕 그것일 수밖에 없다.

  3. 제3강 ○ 우리가 찾는 우리 인생의 보배
    우리가 삶의 본질에 눈뜨지 못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행복의 문제를 항상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손으로 만져지는 바깥 경계에서 찾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하늘에 줄기하고 있다는 고전의 가르침에 대해 구태의연하고 시세에 어긋난 문구쯤으로 취급하고 만다. 여기에 우리가 세속적인 풍요로움에 눈의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 점은 삶의 본질을 자각한 자들이면 누구나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값나가는 자동차에 몸을 싣고 자기의 부를 과시하고, 권문세가의 칼자루로 세상을 농락하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이색은 세상 사람들의 일어나는 마음의 자취가 시대성과 관련을 맺는 측면에 대해 지적하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함을 단연코 주장하기도 한다.
    마치 이색의 그 주장은 지금 이 시대의 어떤 단면을 눈앞에 마주보고서 우리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말처럼 들리는 감마저 없지 않다. 그만큼 지금의 우리들 역시 돈과 냄새나는 지위의 유혹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그를 위해서는 수레바퀴의 흙먼지에 눈을 두고 개구멍으로 굽신거려 가며 납언과 체모로 꼬리를 흔들어 댄다고 풍자하던 유종원의 고사 그대로다.
    다음과 같은 어느 부자집 자제에 관한 신랄함을 상기하게 만드는.
    그 고사 속의 부자집 자제는 말을 몰면서 채찍을 사는데, 그 채찍이 노랗고 윤택하여 보기 좋으므로 5만냥을 주고 샀다. 종원은 그 채찍을 끓는 물에 불려서 씻어내니 노랗던 것이 희어지고, 윤택하던 것이 딱딱해졌다. 그 노란 것은 치자물을 바른 것이요, 윤택한 것은 밀칠을 하여 사람을 속인 거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유종원의 시대뿐이겠는가? 요즈음도 흔히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다. 성형에 매달려 그 얼굴에 치자물을 바르고 그 말에 밀칠을 하여 세상에서 사람을 현혹하려는 무리가 또한 많으니 이런 풍토의 횡횡함 속에서 어느 겨를에 마음의 본질이며 도의 기특함을 구하고자 하겠는가? 따라서 이런 류의 허깨비들에게는 권세의 칼자루와 재화의 풍요로움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자기의 몸을 망치게 되니 해동사문 목우자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재물과 색의 화는 독사의 독보다도 심하니 자기를 돌아보고 그릇됨을 알아서 항상 멀리해야 한다”
    고 하였다.
    그 주장은 재물과 색 그 자체가 그대로 병폐가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재물과 색이 우리의 바깥 경계가 되어 우리 자신의 마음을 휘둘러댈 때의 상황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주인공이 되어 재물과 색을 부릴 수 있다면 공자가 말하는 세상의 보배 그것 이상의 가치를 재물과 세상의 권세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이치가 거기에는 숨겨져 있음도 외면해선 안 된다. 다만 거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다. 우리가 상대하는 세상의 재물과 세상의 권세로 상징되는 객진 번뇌의 대상이 세상을 위해 쓰여지고 세상으로 돌려져야 하는 보살도의 뜻과 보살도의 정신에 입각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권세의 칼자루로 움켜쥐려는 세상의 영화는 하룻밤의 즐거움을 보고 촛불에 나방이 달려들 때와 같은 허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개미가 썩은 고기에 모여 우글거리듯 하는 구린내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니 필경은 자기의 몸을 버리고 인생도 허비하는 안타까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맛보게 되는 하루아침의 순간적인 즐거움보다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하늘과 땅을 우러르고 굽어보아 한 순간도 부끄럼이 없는 종신의 즐거움으로 자기 자신의 낙을 삼고자 했다. 이에 실체가 없는 자신의 의미를 모조리 도로부터 구하고자 했으니 그것이 아니라면 먹고 누리는 삶의 풍요로움조차도 오히려 하나의 욕된 경계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곡의 지론을 먼저 인용해보자.
    “길흉과 영욕은 사람으로 인함이니 내가 그로써 기쁘게 여기고 두렵게 생각한다면, 이는 정(情)이 이기는 것이다. 정이 이기게 되면 하늘(본분사)의 이치는 사라지기 시작하니, 이러고도 내가 몸을 마치게 됐을 때의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벼슬을 시키는 것은 나를 귀하게 하자는 것이요, 녹을 주는 것은 나를 부자 되게 하자는 것이니, 나를 부자 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궁하게도 할 수 있고, 나를 귀하게 하며, 나를 천하게도 할 수 있으니, 내가 감히 그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권리가 저쪽에 있고 내게 없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본시 내게 없는 것을 하루아침에 나에게 주어서 비록 더할 수 없는 부귀를 주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기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이렇듯 기뻐하는 것이 오히려 옳지 못하거늘 하물며 종신토록 즐길 수 있는 것이 되겠느냐. 이른바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저만이 스스로 아는 것이므로, 아비가 자식에게 줄 수도 없고 남편이 아내에게서 빼앗지도 못하게 된다. 무릇 천하의 친밀한 사이는 부자와 부부 같은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서로 주고 빼앗을 수 없으니, 그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누구나 알기만 할 것이 아니라 또 실천을 한다면 반드시 밖에서 오는 근심이 이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고 하였다.
    여기서 이곡은 삶의 본질적인 기쁨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 말하고 있지만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의 궁극적인 안목의 문제로 압축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요는 바깥의 조건이 아닌 바로 자기 마음 안의 사물을 대하는 기미의 문제다.
    불교에서 자기의 발밑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주장 그대로다. 그러므로 이런 시각의 간곡한 가르침은 이곡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아름다운 뜻으로 아름다운 후세의 우리들이 기릴만한 삶의 자취를 남긴 이들이면 누구라도 한결같은 교훈이었다. 실례를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한 사람의 문장가였던 이규보에게서도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무릇 세상의 이치에 깊은 자는 흔히 깊숙하고 한적한 땅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오로지 하고서야 그 들어감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이는 한림원의 직관에 머물다 억울하게 남방 거제현으로 귀양을 떠나는 사관 이모를 달래면서 하는 말이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마음이 두 길로 가지 않음을 주목하게 하는 말일 것이다.
    정명국사는 이름이 천인이었고 성은 박씨였다. 스님은 고려 후기 천태종 백련사의 고승이었다. 성은 박씨이고, 연산출신으로 만덕산 백련사의 제2세로 활동했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글을 잘하여 유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백련사의 원묘국사 요세를 찾아가 스님이 되었다. 그 뒤 송광사의 2세 혜심으로부터 조계선의 요령을 얻었다고 했으며 다시 백련사로 돌아와 수행하면서 요세의 천태교관을 전수 받았다고 전해온다.
    그러던 스님이 열반을 앞두고 았을 때였다. 옷을 갈아입고 좌석에 올라 대중들 앞에서 반문하기를 하늘에 솟구치는 대장부의 기염을 어디다 써야 할 것인지
    “병든 중이 10여 일이 되도록 곡기를 끊으면 다리가 몹시 힘이 없다.
    그러나 법신(法身)의 그윽한 도움을 얻으면 다리 힘이 차츰 건장해진다.
    그 다리 힘이면 천당에도 갈 수 있고,
    불국토에도 갈 수 있으며,
    오온(五蘊)이 통하여 개운하고 삼계(三界)에는 흔적마저 없어진다.”
    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며 열반에 들었다.
    “반쪽 수레바퀴(半輪)의 밝은 달과 흰 구름 가을인데
    바람에 실려 가는 샘물소리 이르는 곳 어디인가.
    시방 세계의 한량 없는 불국토는
    오는 세상 불사(佛事)를 지어 다했구려.”

    열반을 앞두고 있을 무렵에 관한 정명 국사의 고사다.
    스님은 자신의 법통을 문인 원환(圓睆)에게 법통을 넘기면서 당부하기를,
    “내가 죽거든 후한 장사나 탑 같은 것을 세우지 말고, 지위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비명도 구하지 말고, 다만 버려둔 땅에 가서 화장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때는 무신(戊申)년 칠월(七月) 칠석(七夕)이었다.

    여기서 깨달은 자의 경지를 말로 논할 바는 아니나 세상의 만물이 하늘에 줄기하고 있다는 건문언전(乾文言傳)의 요지를 참고하면 결코 말로써 이야기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옛 사람이 말하는 사시(四時)의 설에 견주어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삼봉의 논리가 하나의 좋은 해설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다.
    “하늘은 사시(四時)를 마련하여 한 해가 되고, 사람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어 성정(性情)을 통솔하는 것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四時)가 각각 한 부분을 차지했으나 (하늘의) 어진 덕은 그 안에 내포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봄이란 것은 (하늘 기운의 처음에 해당하는) 봄의 처음이요, 여름이란 것은 봄의 장성이며, 가을이란 것은 봄의 성숙이요, 겨울이란 봄의 거두워 감춤이다. — 이는 하늘의 덕이 잠깐의 끊임도 없으면서 전개되되 그것을 구분하면 사시가 되고, 뒤섞어 놓으면 만물이 되어 변화가 무궁하며 사물이 생겨나고 생겨나서 쉬지 않는 것이다”
    고 하였다.

    한마디로 바른 정신을 빌려 힘을 얻고 나면 우리의 본래 모습이 하늘의 기운에 줄기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바깥 사물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것은 정명국사의 자득처일 것이고, 법신의 그윽한 도움에 힘입는 안목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깊은 이치로서 사람이 배워서 전할 수 있고 말로써 비유되는 경지가 있을 수 있을까? 반드시 그것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받아들여 마음 안에서 뿌리를 내리는 삶 그것이 바로 자기 인생의 보배이고 진정한 기쁨이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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